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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츠이즈)

0117 2017. 3. 3. 00:10

눈을 깜빡였다. 시선이 흐릿한 것이, 잠에서 덜 깬 것 같다. 아 다시 잘까. 리츠는 눈을 감았다. 옆에서 한소리가 들려왔다. 짜증나. 다시 잠들지 마. 곧, 이동해야 하니까. 퉁명스러운 말에 리츠는 인상을 찡그리다 팔을 위로 뻗어 기지개를 켰다.

 

"흐아아암- 셋짱, 불친절해."

"한두번 그런거 아니잖아. 일어나도록 해."

 

말투는 친절하지 않았지만, 머리카락을 쓰다듬다 이내 뺨을 간질이는 손끝은- 다정하기 그지없다. 이런 야누스적인 그를, 리츠는 굉장히 좋아한다. 소파에 누워서 잠을 청했던 것인지라 몸이 찌뿌둥하다. 두득거리며 뼈와 뼈가 부딪히는 소리에 리츠는 입을 삐죽였다.

 

"늙었어..."

"나보다 오래 살았으니, 당연히 늙었지."

"셋짱은 외모상으로는 28세잖아."

"진짜 나이로는 거기서 4는 곱해야지."

 

오래 살았네, 셋짱. 리츠는 볼에 공기를 빵빵하게 집어넣다 이내 시선을 들어 세나를 보았다. 소파의 끝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공활한 정원을 보고 있는 세나의 눈은 약간 젖어있었다.

 

"..."

 

리츠는 눈을 깜빡였다.

파국적인 아름다움이란- 자신이 아는 한에서는, 형을 꼽는다. 경국지색이라고 하지 않던가. 나라에서 칭송받는 미모. 나라가 망해도 모를 미모. 과거, 자신의 형은 한 나라 황제의 첩이었다고 한다. 그런 형이 결국에는 황제와 황제의 형제들을 싸그리 사지로 내몰았다고 전해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형이 올랐다는 것도. 까마득한 옛날의 이야기다. 잘 맞지도 않는 술을 입에 대면 아주 가끔씩 사쿠마 레이의 혀 끝에 저 이야기가 오르내린다. 엷게 눈꼬리치는 웃음에 홀리는 사람들이 지금이나 옛이나 마찬가지다.

 

세나 이즈미는 그런 형과는 약간 다른, 파국적인 아름다움이다. 자신의 형은 꼿꼿하게 서서 고고히 위를 향하는 아름다움이라 칭하면, 세나의 아름다움은 부서지면서 만들어지는 것에 가깝다. 위태로울수록 꺾고 싶은 꽃이다. 낭떠러지 끝에서 가녀리게 핀 꽃이 왜 그렇게 예뻐서 목숨 걸고 데려가고 싶은지 깨닫게 되는, 그런 아름다움이다. 몰려있을수록, 고통에 못견뎌할수록, 세나 이즈미는 아름다워진다. 무서울 정도로 사람을 홀린다. 아니, 사람뿐 아니라 인외의 모든 것들을 홀리고도 남을 것이다.

 

"셋짱 여기에 꽃 안 심어?"

"내가 울면 알아서 자라나잖아."

"수선화 말고."

 

질리도록 본 수선화. 세나 이즈미의 행복을 대변했지만, 이제는 슬픔을 알리는 꽃.

수선화의 꽃말은 자기애(自己愛)라고 한다. 세나 이즈미는 스스로를 너무 사랑한다. 그리고 스스로를 너무 사랑해서 무너져버렸다.

그 무너지는 순간을 지켜본 것이 사쿠마 리츠였다.

기사의 죽음은 왕이 지켜본다지만, 당시 왕은 사망상태였다. 왕의 첫번째 기사가 맞은 임종은, 또 다른 기사가 지켰다.

 

"다른 꽃 말이야. 수선화 말고."

"..."

 

생각해본 적 없다. 세나 이즈미의 정원은 원래 수선화가 만개한 곳이다. 다른 꽃들이 필 공간이 있던가. 다른 꽃이라도 심어봐- 리츠의 말에 세나는 시선을 돌려 그에게 향했다.


"여긴, 수선화면 충분해."

"흐응~"


셋짱, 생각보다 고지식하네. 리츠는 양 손을 깍지꼈다. 다시 잠이 들고 싶었다. 쿠마군, 짜증나게 굴지 말고 그만 자라니까. 세나의 목소리가 귀를 찔렀지만, 리츠는 가볍게 넘겼다. 피곤했다. 몸이, 마음이, 모든 것이.

사쿠마 리츠의 무료함을 달래줘야 하는 세나의 입장에서 그의 수면이 달가울 리 없다. 세나는 다리를 꼬고 리츠를 내려다 보았다.


"어떤 꽃이 좋아?"


세나의 물음에 리츠는 슬쩍 눈을 떴다. 하여간. 쿠마군은 자신을 어떻게 설득하는지, 마음을 돌리는지 너무 잘 알고 있다. 리츠는 발 끝을 통통 움직이며 눈을 도로록 굴렸다.


"장미."


꽃잎이 많고 탐스러운 장미를 좋아해. 라넌큘러스나, 잉글리쉬 로즈류. 리츠의 말에 세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확실히, 리츠의 책이 발간되는 날이면 꽃다발들을 잔뜩 받는다고 알고 있다. 하나같이 다 장미였고. 흔히, 결혼식의 신부를 위한 부케에 보는 장미류들도 있었다.


'Peony(작약)를 굉장히 좋아하시니까요.'


특히 White Peony요. 갓 핀 꽃이 제일 탐스러워서 마음에 들어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단정하게 수트를 여미며 말해주던 스오우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음..."


세나는 리츠를 내려다 보았다. 고요함 속에 시선만이 마주쳤다. 세나는 엷게 한숨을 내쉬었다. 리츠의 잠이라도 깨워야 한다. 곧, 왕이 오니까. 세나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흰 발바닥이 공중을 부유하다 가볍게 땅에 착지하였다. 그리고는 발소리도 내지 않고, 정원의 흙을 밟았다.

정원의 모든 것이 세나 이즈미 안의 권속이다. 자라나는 것도, 지는 것도 세나의 마음이니.


"이 정도면 괜찮아?"

"응."


세나의 물음에 대답을 하며 웃은 리츠는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세나는 정원의 중앙에 섰다. 그리고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눈을 감았다. 세나의 주위를 감싸듯이, 줄기가 올라오는 것을 보며 리츠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생(生)을 만들어내는 움직임이다. 세나는 몸을 돌려 줄기가 뻗는 것을 조심히 바라보았다. 배속 카메라를 돌리는 듯이, 잎이 자라나고, 봉우리가 트고, 흰 꽃잎들이 켜켜이 쌓여 피어난다. 몽우리지듯 피어난 작약을 바라보던 세나는 이제야 리츠쪽으로 몸을 돌렸다.


"만족해?"


세나는 양 팔을 약간 벌리며 물었다. 리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나는 말 없이 리츠를 바라보다 시선을 천천히 내렸다. 짙은 속눈썹이 눈 밑을 드리운다. 리츠는 그런 세나의 움직임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금방이라도, 꽃들에게 파묻힐 것 같았다. 색마저도 자신이 좋아하는 흰 작약이다. 잘 어울리다 못해, 무너질 듯이 아찔한 움직임에 리츠는 몸을 느리게 일으켰다. 꽃이 정원을 메우듯 핀 것도 아니다. 그저, 세나를 중심으로 그를 감싸듯이 자라났을 뿐이다. 그럼에도, 피어난 꽃들이 세나를 누일 관처럼- 보이는 것은 자신 뿐인걸까.


"셋짱."

"아-"


세나의 손목을 잡으며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자 세나는 저항없이 순순히 리츠의 품에 안겼다. 꽃들이 그를 돌려달라고 손짓하는 것 같았다. 흰색의 밀푀유처럼 쌓인 꽃잎들이 벌어져, 잡아먹을 듯이 굴고 있었다.

리츠는 세나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뒤로 한걸음 물러나 세나를 자연스럽게 꽃에게서 멀어지게 하였다.


"이제 잠에서 좀 깼어?"

"어? 아- 응."

"그럼 이제 움직이자."


왕님, 뵈러 가야지. 세나는 리츠를 바라보았다. 키차이가 얼마 나지도 않아서(심지어 세나가 2cm정도 크다) 시선과 시선의 마주침은 거의 일직선에 가깝다.


"셋짱."

"응?"

"다시 되돌릴 수 있지?"

"하- 핀거 다 봤으니 이제 됐다?"


변덕 하고는. 세나는 리츠의 사락이는 뒷머리를 손가락 사이사이에 넣어 굴리다 꽃들을 향해 무언가를 허공에 그렸다. 이내, 꽃들이 봉우리에 감싸여 줄기에 사라져갔다. 자신이 아까 본 상황을 되돌리기 한 듯이.

완전이 땅으로 돌아가자 리츠는 조그맣게 안도했다. 그 순간이 위험했다. 관에 꽃들을 잔뜩 넣고 그 위로 세나를 눕힌 듯한 착각이 등골을 느릿느릿하게 쿡쿡 찔렀다.


"됐지? 나 이제 풀어줘. 움직여야 하니까."


리츠의 품에서 벗어난 세나는 분주히 움직였다. 자신의 정원에서 나가려는 것 같았다. 리츠는 그런 세나를 보며 말 없이 서 있었다. 입 안이 따끔따끔했다.

눈 끝에 아찔함이 드리워, 리츠의 본능에 가볍게 불을 지폈다.

위험했다.


순간- 키스할 뻔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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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퀘박스의 주제 '아찔하다'를 리츠이즈로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