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쿠마 리츠가 싫어하는 기억들은 아주 많지만, 간간이 그의 생애에 잉크가 튄 흔적같이 남은- 그런 기억이 있다.
그걸, 리츠는 죽음이라고 정의하고는 한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그들의 수명을 셀 수 있는 숫자- 그 숫자의 범위가 더 넓은 종(種)인 그에게, 펜촉이 종이의 흐름을 타지 못하고 역류하며 튄 자국.
리츠는 멍하니 모니터를 보았다. 깜빡- 깜빡- 커서 키만 보인다. 흰 것은 바탕. 검은 색이 없었다. 글씨가 써지지 않는다. 어제까지만 해도 빼곡히 채우던 창이, 왜 이리도 이질적인지.
사쿠마 리츠의 최근 죽음은, 본인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죽음이었다. 자신이 섬기는 왕을 위해 달렸던 그는, 애석하게도 첫 번째로 죽어야 했으니까.
억류된 왕의 발끝에도 가지 못한 채 문 앞에서 머리가 꿰여 죽어야 했던 사쿠마 리츠에게, 그 죽음은 생각 이상으로 치욕적이었다. 육체를 교환하는 시스템의 마법사들과는 다르게 그는 땅으로 돌아가야 재생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를 묻었던 건 지금의 황제였다고 들었다. 자살해버린 자신의 왕을 대신해서.
“……. 진실에 가까워지면.”
무슨 진실에 가까워질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의 진실인걸까. 레이의 말이 귀를 돌았다. 맴맴맴. 진실에 가까워- 오랫동안 잘 수 없어- 너를 죽인 자를 없애-
“씨발.”
욕지기를 뱉어보았다. 후련해지지 않았다. 공동묘지에서의 사쿠마 리츠는- 어떤 수확도 얻지 못했다. 물음만 더 얻어왔을 뿐이다.
왜 말해주지 않았을까. 보는 눈이 많아서? 뭐가 문제지? ‘그’ 사쿠마 레이가. 자신에게 숨길 것이 뭐가 있지? 가장 싫어하는 구간을 끄집어내어 입에 올리면서까지.
그런- 큰 일.
리츠는 벌떡 일어섰다. 엉망진창이었다. 글도 안 써지네. 마감은 아직 이었다. 다행인건지. 커피 한 잔 하러 가야겠는데.
옷을 가볍게 걸치고는 운동화를 신고 나왔다. 세나의 운동화. 셋짱이 좋아하는 운동화인데 멋대로 신었다고 화내겠지. 그러거나 말거나. 세나는 리츠의 집에 생각보다 많은 자신의 물품들을 놓곤 했다. 옷도, 신발도, 스스로도.
너와 공유하는 공간, 함께한 시간, 함께한 것들이 여기 있는데 숨기는 게 뭐야? 직설적으로 물었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일종의 얄팍한 배신감이었다. 어른어른 명치로 올라오는 배신감은 약간 구역질을 자아내고는 하였다.
“할로-”
“아, 어서 오세요, 리츠씨!”
상냥함이 흘러넘치도록 해사하게 웃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자신이 자주 가는 커피집의 점원이었다.
“하-군.”
“오늘도 아메리카노세요?”
“응. 아이스로.”
가볍게 결제를 마치고는 볕이 들지 않는 창가에 앉았다. 차분한 웜 그레이의 소파. 어디서 샀는지 물어볼까. 소파가 있긴 하지만 바꿀 겸 하나 마련해야지. 수줍게 웃을 때의 셋짱과 닮은 색이었다. 원래 자주 웃지는 않건만 아주 가끔 웃을 때, 그 기억속의 얼굴과 닮은 색.
다리를 꼬고 발을 까딱이면 유리잔에 얼음 반, 그리고 진한 갈색의 액체를 찰랑찰랑하게 채운 음료가 점원의 손에 들려온다.
“주문하신 아이스 아메리카노에요.”
맛있게 드세요. 이건 리츠씨를 위한 서비스에요. 점원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접시 하나를 리츠 앞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아기자기한 꽃무늬의 접시에는 오레오 쿠키 하나가 꽂혀있는-
“컵케이크?”
“네. 요즘 자주 오시는 손님이 컵케이크를 많이 사가시거든요.”
“그래?”
“맛있겠네.”
“저희가 컵케이크를 8개입 한 박스로 파는데, 그걸 두세 개씩 사가세요. 엄청 맛있긴 한데 그렇게 사가니까 평상시보다 많이 만들게 되더라고요.”
괜찮으시다면 한 번 맛보세요! 점원의 말에 리츠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컵케이크라. 오래간만에 먹어보는 기분이었다. 맨 위의 쿠키를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었다. 그리고는 크림을 핥았다. 프로스팅 된 하얀 버터크림이 혀에 닿아 이내 사라졌다.
“맛있어. 고마워, 하-군.”
“다행이에요.”
안도의 웃음을 띠며 방글방글 웃는 것이, 해바라기 같았다.
“아 맞다.”
하-군. 나 뭐 물어볼 게 있는데. 리츠의 말에 점원은 고개를 갸웃하였다. 리츠는 소파 옆을 툭툭 치며 앉아달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아르바이트 중인데…….”
“어차피 아무도 없고.”
“음-”
비에 젖은 수국같이 맑은 눈을 한 그는 약간 고민을 하다 이내 리츠의 옆에 앉았다. 개인 하늘같은 머리카락이 눈에 일렁거렸다. 순해 보이는 인상에 어울리는 색이었다. 물을 많이 탄 하늘이 구석에 있는 자리에도 드리워지는 것 같다.
“무슨 일이세요?”
“하-군은 만약에 연인이 뭔가를 숨기면 그걸 캐려고 할 거야?”
“네?!”
직설적이신 건 알고 있었지만, 갑자기 연애?! 이내 눈이 댕그래져 리츠를 바라보는 시선은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달래면서 물어야 할지, 이걸 싸우면서 물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에…….”
저는 리츠씨의 연인을 잘 모르지만, 대부분은 맛있는 걸 먹으면서 이야기를 하면 털어놓지 않을까요? 연애는 저도 잘 안 해봐서 모르겠어요. 저는 짝사랑은 전문인데-
“그런가…….”
“연인분이 숨기셔서 섭섭한 거세요?”
“아, 응.”
오래 사귄 것 같은데 야속하게 구네. 리츠는 어깨를 으쓱하며 빨대에 입을 대고 아메리카노를 빨아 마셨다. 담백한 원두의 맛이었다. 로스팅 하나 기가 막히게 잘한다니까, 하-군.
“그럼 오늘은 맛있는 걸 드시면서 얘기를 나눠보시는 건 어때요?”
근사한 레스토랑이나- 아니면 컵케이크요. 방긋 웃으면서 권하는 것이-
“하-군, 오늘은 영업 성공이네”
(중략)
“나 오늘 저녁은 일찍 퇴근.”
“엑!! 사-리 치사해!!”
아직 서류 다 정리 못했는데! 아케호시의 볼멘소리가 들려왔지만 이사라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무언가를 들어 보이면서 말했다.
릿짱이 저녁에 가져다 달라고 했는걸. 어쩔 수 없어. 유명 베스트셀러 작가를 친구로 두고 있으면 이런 것도 대리로 받아다 줘야 하는 거니까. 뭔가 슬픈데? 이사라는 한숨을 쉬었지만 그래도 이걸 핑계로 일찍 퇴근하게 되는 구실이 생겨서 약간 들뜬 것 같아졌다.
“서류 정리만 부탁할게. 나머지는 내일 나도 같이 와서 할 거니까. 그것만이라도 부탁해?”
이사라는 양 손을 맞대며 부탁한다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런 그의 부탁을 거절할 셋도 있다. 이사라는 평소에도 잘 했으니까.
“내일 보자. 어서 가도록 해, 이사라.”
“땡큐!”
이사라는 호쿠토에게 총을 반납하고 후다닥 나가기 위해 신발을 갈아 신었다. 스쳐가는 노트북 하나에서 세나 이즈미의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웃고 있는 세나 이즈미.
[유우군, 나를 찾아줘. 부탁이야.]
어떤 미친 새끼가 관심을 끌려고 학살을 하냐. 저렇게 예쁜 얼굴을 하고. 얼굴에게 사과해라. 미쳐도 단단히 미쳐가지고는. 이사라의 마인드 내에서 허락이 안 되는 행위다.
세나 이즈미는 단단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정신 감정이라도 받게 해야 하는 거 아냐? 물론 경시청 내 프로파일러들의 입을 빌리자면 너무 정상일 것이라고 하였지만.
[보통내기면 미쳤어야 정상이야. 근데 지금 저거 너무 비정상 같은 정상이지? 모순이지만 저게 되는 거야.]
금방이라도 사랑을 고백하고 싶을 정도로 밝게 웃는 저 얼굴을 누가 싫어하겠어. 연예인이었으면 전력으로 응원했을 것이고, 주변 사람이었으면 지켜주고 싶을 것이고 고백하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얼굴인데.
“사-리. 내일 늦지 말고.”
아케호시가 헤헤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이사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켓을 입었다. 리츠의 집까지 오래 걸리지 않아서 좋다니까. 가는 길에 커피집도 있으니까 리츠 만나고 집에 가면서 커피 사가야지.
이사라는 자동차에 시동을 걸었다. 맛있는 걸 준다고 해서 가는 거야. 절대 셔틀이 아냐, 나는. 애써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도착했군!”
금세 리츠가 사는 맨션에 도착했다. 차를 바꾸니까 가는 속도부터가 다른 기분이었다. 물론 똑같지만. 블루투스 키보드를 들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가기 전에 문자 보냈는데. 봤으려나.
704호의 앞. 실은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알고 있지만 부러 누르지 않았다. 초인종을 눌러보았다. 딩- 동-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없나…….”
밖에 있는 건가. 그럼 말을 해주지. 집에 갈까. 이사라는 씁쓸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보았다. 그 순간-
“누구?”
찰칵- 하고 문이 열리면서 금발의 남자가, 리츠의 집에서 고개를 내밀며 이사라와 눈을 마주ㅊ…….
“어?”
“음?”
처음 보는 사람의 얼굴에 이사라는 그대로 뒷걸음질 쳤다. 아, 자신이 집을 잘못 찾았나? 그럴 리가 없는데? 이사라는 고개를 올려 호수를 확인하였다. 704호. 사쿠마 리츠의 집이 맞다. 뭐지? 이사라의 눈에 당황함이 가득이 물들었다.
“누구?”
금발의 남자가 고개를 빼꼼히 내민 채 녹색의 눈을 깜빡이면서 이사라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꺾고 인상을 살짝 찡그리고 있는 것이- 으아아, 참 잘 생겼는데 무서워! 풀풀 풍겨오는 경계의 시선에 이사라는 어버버하며 말을 잇지 못하고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저기… 저… 저기… 여기…….”
"쿠마ㄱ……. 아니, 리츠군 찾으러 온 거?"
"아, 네!"
이사라는 블루투스 키보드가 들어있는 박스를 들어 올려 보이며 말했다. 남자는 그제야 천천히 문을 열어주었다. 이사라는 안도하며 리츠의 집 안으로 발을 디뎠다. 실례합니다.
“릿짱에게 동거인이 생겼다는 얘기는 못 들었거든요. 놀랐어요.”
“아아. 동거- 거창한 소리야. 종종 하룻밤 신세지는 사이여서 동거라고 하기도 뭣해.”
“리츠는요?”
“잠깐 자리를 비운 걸로 알고 있어. 곧 올 거야. 난 나갈 거고.”
남자는 휴대폰을 들고 리츠의 드레스 룸으로 걸어갔다.
“…….”
저 남자는 리츠를 잘 모르는 남자인걸까. 하룻밤 종종 신세지는 사이. 자신의 기억에 그 하룻밤이 원나잇인지 저스트 슬립인지는 모르겠지만 전자는 자신에서 끝난 것으로 알고 있다. 뭐- 그 뒤는 알 바가 아니려나. 릿짱의 프라이빗이니까. 마오는 정면에서 보이는 드레스룸, 그리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깜빡- 그리고 다시 한 번 깜빡.
“어?”
남자가 상의를 갈아입으려는지 옷을 벗자 굉장히 익숙한 문신이 보여 본이 아니게 목소리를 살짝 내었다. 허리에 있는 문신.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꽤 특이하다. 최근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건 아는데, 저런 건 특이해서 기억하고 있단 말이지. 어디서 봤더라……. 이사라는 볼에 공기를 빵빵하게 불어넣으며 남자를 보다 조심히 입을 열었다.
“저기.”
“……. 응?”
“혹시 허리의 문신, 어디서 하셨어요?”
“신주쿠.”
답이 바로 돌아온다. 신주쿠에 그런 걸 취급하는 곳도 있구나. 나중에 호쿠토, 마코토, 스바루 데려가서 저런 거라도 해 볼까- 생각을 해 보았다. 허리는 너무 아플 것 같으니까 팔뚝 같은 데라도.
“인상이 깊어서요.”
“그래? 이거, 너도 봤을 거야. 네 친구 허리에도 있어.”
“아-!”
맞아. 리츠- 리츠였구나! 이사라는 깨달음을 얻은 눈으로 남자를 보며 고개를 거세게 끄덕였다. 리츠가 종종 옷을 입을 때 보곤 했었다. 그래서 자신의 기억에 있는……. 아닌데. 최근에 봤단 말이지만- 최근에 리츠가 옷을 벗은 기억이 없어.
“같이 하셨어요?”
“어.”
이거, 네 친구가 고른 거야. 남자는 웃으면서 리츠의 코트를 꺼내 걸쳤다. 옷도 빌려 입을 정도면 보통 사이는 아닌데.
“커피, 내려줄까?”
오래 기다릴 거면. 곧 올 것 같은데. 남자는 시계를 차며 마오를 바라보자 마오는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에요! 리츠 얼굴만 보고 갈 거여서…….”
이것만 전해주면 되는 거거든요. 이야기 할 것도 있으니까요. 릿짱, 곧 올 거예요. 이사라는 선선하게 웃으면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래? 내가 먼저 나가야 할 듯한데. 혼자 기다릴 수 있어?”
“네. 리츠 오면 나가셨다 말할게요.”
“그래주면 고맙고.”
남자가 웃었다. 저 웃음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데. 어디서 봤더라. 비현실적으로 예쁜 남자였다.
리츠가 베스트셀러 작가인지라 셀러브리티는 아닐까 싶어 TV나 잡지를 생각해 보았지만, 이사라는 잡지를 구독하지도 않고 TV는 집에 들여놓지도 않았다. 리츠와 동거를 했다가 헤어지면서 이사를 할 때 그런걸 아예 구매하지 않았기에 기본적으로 통신매체들과 거리가 약간 있는 이사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