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Zero
리츠마오) 마물과 그대 본문
(BGM과 함께 해주세요.)
얼마나 오래 지났는지, 다 식어서 머그마저 차가워진 커피를 바라보았다. 아- 다시 타야 하는 건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리츠는 의자에 앉은 채 고개를 뒤로 젖혔다. 천장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이렇게 무기력한 적이 있던가. 물론 있다. 없지는 않지. 본인이 살아온 생애가 몇이던가. 얼기설기 짠 관 속에서 잘 때도 무기력했고, 고급 관에서 잘 때도 무기력했었다. 숨 쉴 때마다 무기력함에 모든 걸 다 던져버린 적도 있다. 없을 수가 없지. 본인의 나이를 세는 것은 잊었다. 자신은 그저 ‘생일’만을 기억할 뿐.
뭔가의, 사이클처럼 찾아온다. 무기력이라는 ‘친구’는. 씨발, 친구라니. 친구는 무슨. 어디의 애인, 어디의 연인, 어디의-
“하-”
생각 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이 이상 생각하면 없던 감정도 자신의 어깨 위에서 ‘오늘의 운세는 최악입니다~’라고 하겠지. 와우. 사쿠마 리츠는 몸을 일으켰다. 이럴 때엔 스-짱의 펜트하우스에 쳐들어가서 최고급 스테이크를 썰면 기분이 좀 나아질 지도 몰라. 아냐. 기분이 나아지긴. 기분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다시 의자에 앉았다. 지금 이 모습을 형이 본다면 자신이 귀여워 죽겠다며 생글생글 웃겠지. 당신의 행복은 나의 지옥. 오락가락하던 기분이 대번에 나빠졌다. 최악의 상태로 가고 있었다. 사쿠마 리츠라고 하는 주가가 하락하고 있었다. 폭락이었다. 이 증시 언제 마감이죠.
리츠는 양 손을 들어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마른세수를 하며 머리를 비우려고 애썼다. 글을 써야지, 글을. 밥 벌어 먹고 살려면 글을 써야해.
솔직히 지금 가지고 있는 재산이 몇 없지만 셋짱의 옆구리에 빨대를 꽂으면 아마 자신을 먹고 살기 참으로 편하게 해주지 않을까. 실제 자신의 왕님만큼이나 천문학적인 재산을 소유 중인 세나 이즈미라면- 자신이 불쌍해서라도 거둬줄 것 같았다. 물론 하루에 열 번 이상의 잔소리를 귀에 달고 다니겠지만, 그런 잔소리라면 가볍게 들어줄 수 있다.
정 셋짱도 아니라면 낫짱이라면. 낫짱은 늘 바쁘니까 나는 낫짱의 집 침대에 누워(낫짱의 침대는 고급이어서 그런지 잠도 참 잘 오던데.) 신나게 잘 수 있을 것 같아.
생각하는 것을 그만둔다더니, 쓸모없는 잡생각을 더 하고 있었다. 리츠는 볼에 공기를 빵빵하게 불어넣고는 푸우우우- 내쉬었다. 노트북을 바라보았다. 흰색. 흰색. 흰색. 커서 키만 깜빡이고 있다.
“정말 환기가 필요한 것 같아.”
내 집 말고, 내 머릿속. 리츠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양 손으로 양 뺨을 아프지 않게 찹- 때렸다.
“휴대폰이 어디 있지.”
휴대폰. 어딘가에 존재는 하겠지. 셋짱의 버릇이 옮은 걸까. 셋짱도 휴대폰을 던져놓고는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자신의 휴대폰에 전화를 해 달라고 꽤 자주 말한 적이 있다. 다행인건지 그래도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배터리가 30%밖에 없네. 그러거나 말거나. 익숙한 손길로 잠금을 해제하고 빠르게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그리고 통화.
몇 번의 수신음이 간 뒤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들렸다.
[리츠 선배?]
“스-짱.”
[무슨 일이신가요? 혹시 어디 다치셨거나?]
“걱정이 너무 많네, 우리 집 막내는.”
[‘우리 집’이라는 Title이 조금 거슬립니다만. 아까 Meeting이 끝나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리저리 할 게 너무 많아요. 집안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Succession한다는 것은 이렇게 짜증날 일이군요.]
Jesus christ! 이 와중에 컵도 엎었어요. 오늘 일이 안 풀리네요. 맛있는 게 먹고 싶어요. 스-짱이라고 불리는, 스오우 츠카사- 그는 우울한 목소리로 리츠에게 말했다.
“스-짱. 오늘 저녁 같이 할래?”
[Really?]
“응. 스-짱의 집에서 맛있는 스테이크를 먹고 싶어.”
[후- 오늘 저의 집은 무리일 겁니다. 괜찮은 곳이 있는데?]
“응. 데리러 올 거야?”
[그러죠. 15분 뒤 뵙겠습니다.]
배터리 없으니까 빨리 전화 줘. 리츠는 전화를 끊으며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거렁뱅이처럼 입고 들어가도 되긴 하지만, 괜히 그랬다간 스-짱에 잔소리를 셋짱처럼 들을 것이다. 리츠는 검은색의 차이나 셔츠를 목 끝까지 잠그고는 소매에 커프스를 끼웠다.
‘세련되고 근사하게 입을 거면 나가지 마.’
순간 손이 멈췄다. 하. 귓전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너무 선명하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리츠는 목소리를 무시하며 거울을 보았다. 잘난데다 잘생기기까지 한 추리소설 베스트셀러 작가가 거울 건너에 서 있었다.
‘잘생겼네. 매력도 넘치고.’
키들키들 웃으면서 커피를 마시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아메리카노겠지. 넌 늘 그랬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게 몇 달째야. 어디 괜찮은 정신과 클리닉이라도 소개시켜달라고 에이전시에 말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을 하였다. 어차피 자신은 스오우 코퍼레이션 산하의 출판사 소속이니 스-짱한테 자신에게 환청이 들린다고 하면-
스-짱 고혈압으로 넘어가지 않을까. 리츠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손목에 시계를 차고는 왼손 엄지에 메탈블랙의 반지를 끼워 넣었다. 트렌치코트까지 걸쳤으니-
준비완료.
휴대폰을 보았다. 슬슬 전화가 올 것 같았다. 가볍게 구두를 신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는 곳에 노트북이 켜져 있었다. 아마- 시간이 되면 꺼지겠지.
‘가지마.’
함께 있어줘. 멀찍이서 들려오는 미련 넘치는 목소리에 리츠는 고개를 반대로 돌리며 현관문을 손으로 잡았다.
“사랑해.”
아직도 말이지. 리츠는 힘을 줘 문고리를 돌렸다. 무거운 발길을 구두 소리만이 나타내는 듯 복도를 울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자 괜찮은 세단 한 대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Nice timing."
“스-짱. 배고파.”
“얼른 가죠.”
조수석에 타며 안전벨트를 맨 리츠는 츠카사를 보며 양 손을 맞부딪혔다. 고기- 고기-
“작업에 진척은 있으십니까?”
“아니.”
리츠는 딱 잘라 대답하며 고개를 창문으로 돌렸다. 외면하지 마세요. 저도 리츠 선배 책의 열혈적인 독자 중 하나랍니다. 스오우는 핸들을 돌리며 리츠를 슬쩍 보았다. 얼굴을 보니 더 이상 이야기 해봤자 소용도 없을 것 같았다.
“출판사 쪽을 움직이…….”
“됐어.”
추리소설을 쓰기 싫은 것일 뿐이니까. 다른 걸 쓰라면 잘 쓸 수 있을 것 같아. 리츠는 심드렁하게 말하며 눈을 감았다. 도착하면 깨워줘. 나 요즘 잠도 못 잔 것 같거든. 일은 진척도 없고, 잠도 안 오고. 이게 무슨 일이야.
“그럼 잠시 주무시지요.”
츠카사의 말에 리츠는 기다렸다는 듯이 조수석을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잠도 못 잘 정도라니. 출판사를 통해서 들었었던 슬럼프라고 하는 말이 사실이었다. 리츠 선배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잠이 아니던가. 츠카사는 걱정스러운 시선을 리츠에게 돌리며 핸들을 왼쪽으로 틀었다.
엔진소리가 적은 고급 세단을 끌고 와서 다행인 것 같았다. 가끔 쓰는 요란 벅적한 스포츠카를 끌고 올까 하다 출판사 쪽 편집장을 통해 들었던 이야기가 기억나서였다.
‘글을 안 쓰세요.’
‘네?’
‘본인의 입으로 슬럼프라고 하십니다.’
‘리츠 선배가 슬럼프라고요……. 슬럼프. 후……. 슬럼프요.’
세 번을 물었다. 진짜 슬럼프냐고. 슬럼프인 척 하는 거 아니냐고- 라고 물으려다 리츠가 그러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입을 다물었다. 그럴 확률이라도 있으려나 싶지만 이건 확률의 문제가 아니다. 0이 아니면 1이듯이 이분법적으로 생각할 쪽이었다.
스오우 츠카사가 알고 있는 사쿠마 리츠는 만사가 다 귀찮고 피로하지만 본인에게 할당된 일은 다 해내는 자다. 잔소리가 많은 세나 선배나 아라시 선배도 리츠 선배가 글을 쓴다고 하면 조용히 자리를 피해줄 정도로. 리츠에게 본인의 직업 소명 의식은 확고하다. 그런 분이 슬럼프라고.
‘언제부터 그랬습니까.’
‘몇 달 전부터 연재를 잠시 멈추고 싶다고 하셨는데.’
‘후-’
몇 달이라. 오래 버틴 셈이다. 눈치를 못 챈 탓도 있을 것이다. 글을 쓰는 생산적인 작업장에서 조성된 환경에 문제가 생겼다면. 다시 생산을 할 수 있도록 환경을 바꿔주거나, 그 환경에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리죠.’
‘네?’
‘전 제 선배가 억지로 글을 써서 책을 내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돈으로 돌아가는 세상이긴 하지만 억지로 쓰인 책에 몰입할 수 있을 리가 없죠. 그건 비단 독자인 저 뿐 아니라, 저와 같은 독자의 위치에 선 편집장님께서도 아실 거라 믿습니다.’
환경을 굳이 바꿀 필요가 있습니까. 그런걸 보고 악수(惡手)라고 합니다. 나는 악수는 두고 싶지 않습니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이독제독(以毒制毒). 투자를 하면서 악수를 두는 것은 악수 앞에서 두는 겁니다. 전 지금 리츠 선배의 상황이 악수를 건너에서 둘 정도까지는 도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압니다. 츠카사는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컵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편집장을 향해 조용히 웃어보였다.
‘독자 된 입장에서 다음 권이 궁금하기는 하지만, 독자이기 이전에 저는 리츠 선배가 속한 출판 에이전시의 머리이기도 하지요. 저에게는 작가의 케어가 더 중요합니다. 그 시간의 인내는 쓰나 열매는 달 것이라고 믿습니다.’
‘정말 굳게 믿으시는 군요.’
‘그래야죠.’
제 선배인걸요.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웃었었다. 굳게 믿는다고. 믿음은 신뢰에서 만들어지고, 리츠는 츠카사의 앞에서 신뢰를 무너뜨린 적이 한 번도 없다. 자신들이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오랜 시간. 인간들에게는 너무 긴 시간. 자신들에게는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시간.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선배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믿음에 보답하는 것이 아니던가.
“아.”
거의 다 도착했다. 긴자에 괜찮은 지분으로 투자했던 건물이 완공되어 고급 레스토랑을 오픈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자국 내 셀러브리티들이 간간이 이용한다고 들어서 한 번은 선배를 데려가야지- 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타이밍이 정말 좋았다.
“이제 내리시면- 리츠 선ㅂ…….”
많이 못 주무셨다고 하셨지. 츠카사는 차를 돌려 주차를 했다. 고급 세단이 라인 안으로 유려하게 들어왔다. 이제 리츠를 깨워 문을 열고 내리면 되겠지만 츠카사는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는 시동을 끈 채 운전석에 등을 편하게 대며 리츠를 보았다. 깨우지 않을 예정이었다. 알아서 리츠가 눈을 뜰 때까지 기다릴 셈이었다. 자신이 아는 리츠 선배는 먹는 것보다 잠을 자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왼쪽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IWC사의 클래식 시계가 손목 위에서 지금은 8시 12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츠카사는 휴대폰을 들어 통화 사운드를 최저로 낮추고 레스토랑에 전화를 걸었다.
“스오우 츠카사입니다. Reservation을 미루려고 합니다.”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용건을 전하며 리츠가 뒤척이는 것을 보았다. 한손으로 조수석의 안전벨트를 풀어주었다. 벨트가 빨려 들어가는 소리도 들릴까 조심했다.
“아뇨. 저보다는 제가 대접하고 싶은 분께서 차에서 주무시고 계신지라. 딱히 깨우고 싶지 않군요.”
깨시면 들어가겠습니다. Shut down시각이 있으시다면 알려주시지요. 예. 알겠습니다. 통화를 종료한 츠카사는 이어폰을 꺼내 휴대폰의 이어폰 단자에 끼워 넣었다. 리츠가 깰 때까지 노래를 들을 셈이었다. 나오는 노래 자동 선곡도 좋네. 한 곡 반복으로 돌려놓고 구두 끝을 까딱이며 호소력이 넘치는 목소리로 설득하는 노래를 감상했다.
All you have to do is stay a minute Just take your time(잠시 몇 분이라도 내 곁에 있어주면 돼. 그냥 천천히 시간을 가지고.)
“The clock is ticking, so stay.”
금방이라고 사라질 듯이 조그맣게 목소리를 내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츠카사가 할 것은 없었다. 솔직히 글이 안 써진다고 하면 안 쓰면 되는 거 아닌가. 물론 이번 권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 절단신공을 발휘해, 다음 권이 너무 궁금해서 가슴 치게 만들긴 했다.
그럼에도 스오우 츠카사는 리츠가 글을 쓰는 것이 힘들다면 당장에 작업을 멈추게 하고 어디 괜찮은 여행지를 찾아 최상급의 서비스를 자랑하는 별 다섯 개 호텔에 퍼스트 석 비행기 표를 끊어 쉬게 해 줄 자신이 있다. 세나 선배여도, 나루카미 선배여도 그렇게 했을 것이고-
“Leader라면…….”
그냥 본인이 끌고 여행을 가셨겠지. 여권이 뭐냐? 라면서.
마법사의 왕. 인간이 가질 수 없는 것들을 가진 자들의 왕. 자신들이 기사(Knight)로써 모시는 자. 그의 권능 중 하나는 공간을 아무렇게나 넘나들 수 있는 것이었다.
‘이거 봐- 당장 나는 스오의 방문을 열고 발을 내어 나가면 프랑스에 있을 거야. 인도에 있을 수도 있지. 콜롬비아에 있을 수도 있어. 내가 가진 것 중 하나를 행사하면 그러해.’
자신의 왕은 너무 당연하게 말하며 양 손으로 일회용 테이크아웃 잔을 들어 빨대로 과일 스무디를 쪽쪽 빨곤 했다.
지금쯤 어디에 계시려나. 간간이 연락을 취하는 나루카미나 세나나 리츠와는 다르게, 왕은 종횡무진 전 세계를 누볐다. 한 달 전에 베트남이셨으니 계속 계시려나. 연락이 된다면 찾아가고 싶지만, 왕은 급한 일이 일어나거나 하지 않는 이상 기사들을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자신은 종장(終章)이다. 왕의 부름을 자신이 먼저 받을 일은 앞의 기사들이 죽지 않는 한, 없단 소리이기도 하니까.
이어폰을 통해서 들려온 노래가 정확히 다섯 번을 반복되어 완전히 끝났을 때 리츠는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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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으로 뵙겠습니다:-)